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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70년대 한국의 국민병(國民病)

National Disease of South Korea in 1950s~1970s

Article information

Public Health Aff. 2018;2(1):131-137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18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29339/pha.2.1.131
Institute of Medical History and Culture, Seoul National University Hospital
김상태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교수
Received 2018 July 6; Revised 2018 September 12; Accepted 2018 September 29.

1. 국민병(國民病), 결핵

1950년대의 한국 사회라고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개념어들이 있다. 분단, 멸공, 장기집권, 부정선거, 절대적 빈곤, 삼백산업(三白産業), 부정부패, 실향민, 판자촌 등이다. 그런데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고은 시인이 1958년 문단에 나올 때 발표한 시는 이 개념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순수 서정시도 아니다. 그의 데뷔 작품 제목은 ‘폐결핵’이다. 우선 그 시의 일부를 감상해보자.

누님이 와서 이마 맡에 앉고

외로운 파스 하이드라지드병 속에

들어 있는 정서(情緖)를 보고 있다.

뜨락의 목련이 쪼개어지고 있다.

한 번의 긴 숨이 창 너머 하늘로 삭아가버린다.

오늘, 슬픈 하루의 오후에도

늑골에서 두근거리는 신(神)이

어딘가의 머나먼 곳으로 간다.

병고에 시달리고 있는 청년의 답답하고 서글픈 내면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럼 당시 고은 시인이 폐결핵에 주목하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개인적인 병력(病歷)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한국의 1950년대는 결핵 전성시대였기 때문이다. 결핵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질병 중 하나로서, 18세기 후반부터 전 세계를 휩쓸었다.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에 영양 상태가 나쁜 빈민과 10~20대 학생들이 결핵균의 표적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 한국의 결핵환자는 대략 40만 명이었고, 결핵으로 목숨을 잃는 사람은 해마다 4만 명 내외에 달했다.

해방 후 한국인들의 빈곤이 계속되고 보건위생 여건도 여전히 열악한 가운데 교통수단의 발달과 도시화로 인한 인구집중으로 결핵균은 더 빨리 퍼져나갔다.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이었던 1952년 전국(남한)의 결핵환자는 120만 명에 달했다. 전쟁 직후인 1954년 서울시내 남녀 고등학생들을 검진한 결과 결핵 보균자는 6.63%나 되었다. 같은 해에 전국에서 결핵 중환자만 50만 명, 결핵으로 인한 사망자가 하루 평균 3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956년 고아원 200곳의 원아들에 대한 질병 조사 결과 결핵은 영양실조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1962년 전국의 결핵환자는 80만 명, 해마다 4~5만 명이 결핵 때문에 사망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65년 9월 대한결핵협회는 서울 시민의 6.2%, 서울 시내 초등학교 아동의 45.2%가 결핵에 감염되었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정부는 보건소를 중심으로 결핵 퇴치운동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그러나 결핵 전문병원이나 요양원은 전국에 몇 곳밖에 없었다. 1962년경 전국에서 입원해야 할 결핵환자가 50만 명이었는데, 병상은 3천개에 불과했다. 그래서 1962년 한 신문은 대한민국을 가리켜 “폐결핵에 무관심한 왕국”이라고 꼬집고, 정부 당국의 무관심과 무대책을 가리켜 “한 해에 읍(邑) 하나가 망해도 먼 산의 불 보듯” 한다고 비판하였다.

그림. 1.

결핵예방강조기간 선전탑(1958년)

그림. 2.

결핵예방강조주간 포스터(1960년대)

그림. 3.

제1회 전국결핵실태조사 (대한결핵협회, 1965년)

그림. 4.

대한결핵협회 이동 검진차(1960년대)

2. 기생충 왕국, 대한민국

1950~1970년대의 한국은 스스로 ‘기생충 왕국’이라 부를 정도로 국민 대다수가 기생충을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 신문 보도에 의하면, 1959년 전국 초중고교 학생 50만 명을 검사한 결과 회충이 있는 학생이 63%나 되었다. 1965년 대한기생충박멸학회와 외국 민간원조기관(KAVA)이 공동으로 전국에서 약 2만 명을 대상으로 표본조사를 실시하였다. 기생충 왕국이라는 별명답게 국민 81.5%가 회충, 십이지장충 등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었다. 기생충 때문에 해마다 평균 2천 명이 숨지고, 내과환자 40%가 기생충으로 인해 발병하였다. 피해금액도 2,600억 원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67년 서울 시내 초중고교 학생 67만 명 중 65%가 기생충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기생충별로는 회충, 촌충, 십이지장충 순이었다.

1962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리는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에 파견할 후보 선수 267명에 대한 정밀 신체검사가 실시되었다. 유사 이래 처음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93.4%에 달하는 선수들이 기생충을 보유하고 있었다. 1965년 외신 보도에 따르면, 서독 보건당국이 루르 공업지대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를 검진한 결과 국적별로 분류하였을 때 한국인 노동자들의 77%가 기생충을 보유하여 1위를 차지하였다. 2위인 터키인 노동자들은 5%였다. 결국 국제사회에서 한국은 인력 수출과 함께 기생충도 수출하였다는 오명을 썼다. 1967년 가톨릭의대 기생충학교실은 서울시내 남대문시장, 영등포시장 등 5개 시장에 반입된 배추, 무, 파를 수거하여 기생충 오염 정도를 조사하였다. 파에서는 기생충이 100% 나왔고, 배추는 회충이 50%, 무는 구충란이 60%에 달했다.

1950~1970년대 한국에 회충, 십이지장충 등 기생충이 많았던 이유는 가난 때문에 대다수의 국민의 영양상태가 고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성장과정에 있는 어린이들의 감염 정도가 심각하였다. 보건위생에 대한 지식과 사회여건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그리고 배추 등 채소밭에 주는 인분비료가 기생충 왕국의 번영을 견인하였다. 특히 맨발로 밭에 들어가 일하는 농부와 맨발로 밭둑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은 십이지장충의 표적이 되었다. 폐디스토마와 간디스토마에 감염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1962년 가재와 게를 생식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폐디스토마에 감염된 국민이 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민물고기를 날로 먹은 사람들은 간디스토마에 감염되었다. 보건행정 당국이나 의료계, 언론사 등에서는 기생충을 근절하기 위한 준수사항을 만들어 대대적인 홍보활동을 벌였다. 준수사항의 대표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 채소나 과일은 반드시 5회 이상 씻어 먹는다.

② 육류나 민물고기는 익혀 먹는다.

③ 우물물이나 냇물은 끓여 먹는다.

④ 어린이의 경우, 항상 손을 깨끗이 씻고 손톱을 짧게 깎는다.

⑤ 변은 반드시 변소에서 보는 습관을 기른다.

⑥ 홍역에 가재를 먹는 것을 절대 금한다.

⑦ 맨발로 밭 근처에서 놀지 않는다.

정부는 보건소를 중심으로 기생충 예방을 위한 무료상담과 검사를 벌였고, 1969년부터 초중고 학생을 대상으로 매년 2회씩 기생충 검사와 구충제 투약을 실시하였다. 그래서 당시 일선 학교에서는 1년에 두 번씩 채변봉투와 회충약에 관한 수많은 에피소드가 탄생하곤 했다.

그림. 5.

기생충예방 계몽 포스터(1960년대)

그림. 6.

기생충예방강조주간 기념식(1970년대)

그림. 7.

보건소 직원들의 기생충 상담(1970년)

3. 치명적 ‘3무(無) 가스’ 전성시대, 연탄가스 중독

1959년 어느 13세 소녀가 시골에서 상경해 남의 집 식모살이를 시작하였다. 하루는 고향에서는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19공탄에 불을 피웠는데, 그 피어오르는 불꽃이 하도 신기해서 유심히 구경하다가 그만 가스에 중독되어 숨지고 말았다. 1961년에는 서울 제기동에서 일가족 6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5명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집주인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려오다가 자기들이 쓰던 안방과 건넛방을 세를 주고, 대신에 마루를 방으로 고쳐 쓰기 시작하였는데 3일 만에 참변을 당했다. 1962년에는 서울 영등포의 한 산부인과병원 산실(産室)에서 연탄가스가 새어나오는 바람에 신생아가 세 살 난 누나와 함께 숨졌다. 같은 해 인천의 한 호텔에서는 신혼부부가 첫날밤에 연탄가스 중독으로 사망하였다. 검찰의 현장검증을 통해 객실 장판 가장자리가 뚫려 있었고, 연탄을 피워본 결과 연기가 새어나올 뿐만 아니라 굴뚝이 막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나라에 연탄이 널리 보급된 것은 한국전쟁 때, 특히 9.28 서울 수복 직후부터였다. 처음에는 경상도의 일부 지방에서 난방 및 취사용으로 사용하였다. 정부의 강력한 산림녹화정책으로 나무 땔감을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연탄은 화력이 좋았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결국 연탄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대한민국 일반 가정의 주된 에너지원으로 자리를 잡았다. 서울만 해도 1962년과 1964년 사이에 연간 184만여 톤에서 371만 톤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그러나 1965년 이후부터 연탄 공급이 달리기 시작하였고, 정부는 연탄의 안정적 공급과 연탄가격 관리에 늘 애를 먹었다. 서민들로서도 연탄은 첫 손가락에 꼽는 생필품이었고, 특히 김장 김치와 함께 월동 준비물의 양대 산맥이었다. 곧 연탄은 일반 가정의 재산목록 1호였다. 오죽하면 동네마다 연탄을 조금씩 훔쳐가는 좀도둑들이 있었을까.

그러나 연탄은 약 주고 병 주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였다. 연탄이 불붙을 때 산소의 공급이 원활치 않아 내뿜는 일산화탄소가 문제였다. 22공탄 한 개가 배출하는 일산화탄소량은 대체로 20명의 인명을 앗아갈 수 있는 양이었다. 일산화탄소가 공기 중에 0.5%만 포함되어 있어도 그 공기를 마신 사람이 5~10분 만에 죽을 만큼 무서웠다. 일산화탄소는 냄새, 맛, 색 등 세 가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알아채기가 어려워서 더욱 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1960년대에 해마다 방문이나 방바닥 갈라진 틈으로 스며들어와 앗아간 생명만도 1천 명이 넘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사경을 헤매다가 다행히 깨어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그 중 상당수는 후유증으로 실어증이나 치매, 정신질환에 걸렸다가 결국은 쇠약해지거나 사망하기도 했다.

행정당국은 연탄가스 중독사고 대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1967년 서울시 경찰국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마련해 시민들에게 홍보하였다. ① 아궁이, 온돌, 연통 등 시설을 보완할 것, ② 부엌에 환기장치를 만들 것, ③ 부엌과 방이 통하는 문은 밀폐할 것, ④ 방 틈에는 이중으로 종이를 바를 것, ⑤ 습기 찬 연탄은 말려서 피울 것, ⑥ 연탄불은 낮에 갈아 넣을 것, ⑦ 연탄을 갈아 넣을 때는 마스크를 할 것 등이었다.

의료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에서도 응급처치법과 보다 근본적인 대책의 연구, 개발을 위해 노력하였다. 1960년대 초반에는 비타민 C가 연탄가스 중독에 효과가 있다거나 호박산소다 주사만으로도 중독된 환자가 깨어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왔다. 공군에서는 연탄가스경보장치를 개발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예방의학교실에서 국내 최초로 고압산소기를 제작하였고, 공군에서도 인체용 산소가압실 제작에 성공하였다. 대한탄업주식회사는 10년 동안 제독연탄을 연구ㆍ개발하였다고 해서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1968년 서울시가 제독연탄 발명에 현상금 1천만 원을 내걸자 5일 만에 전국에서 290점의 작품이 쇄도하였다. 그 가운데 아궁이 고치는 이들의 출품이 30%나 되어 이목을 끌었다. 1970년대에도 연탄가스 중독 대응책에 대한 아이디어가 속출하였다. 한 사립대학병원에서는 식초요법을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이 식초요법으로 효과를 본 환자도 있었지만, 환자가 식초를 마시고 목에 심한 중화상을 입는 불상사도 일어났다. 뒤이어 암모니아-초산 혼합물도 등장하였고, 겨울철 밥상의 필수품인 동치미 국물이 효과가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그림. 8.

고압산소장치(1970년대)

4. 보건위생 분야의 새마을운동, 쥐잡기 운동

1950~1970년대에 정부는 대대적으로 쥐잡기운동을 벌였다. 쥐가 소탕되어야 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아파트 전성시대가 열린 지 오래지만, 197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인들은 대체로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그런데 불청객인 쥐들이 한국인들의 집에서 막무가내로 동거생활을 하곤 했다. 밤이면 안방 천장에서 쥐들이 뛰어다니는 바람에 잠을 설치곤 했다. 마당이나 수돗가, 담장 위에도 쥐들이 많이 다녀서 아이들이 놀다가 놀라기 일쑤였다. 쥐가 부엌이나 마루, 심지어 방 안에 들어오면 어디에 숨었는지 찾아내서 빗자루나 막대기로 쑤셔서 쫓아내느라 바빴다. 쥐가 밤에 들어오면 공포감은 더욱 커졌고, 소동 정도가 아니라 한바탕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런데 쥐들은 번식력이 좋아서 아무리 잡아도 끝이 없을 만큼 많았다. 1960년경 보건사회부는 남한에 있는 쥐의 수를 5천만 마리로 추산하였다. 곤궁하던 시절 쥐가 먹거나 버려놓는 쌀이나 음식의 양이 만만치 않았다. 1960년경 쥐들은 하루 평균 1,250톤에 달하는 국민들의 식량을 먹어치우거나 망쳐 놓았다. 의류, 이불, 가구, 기타 재산의 손실도 컸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쥐가 전염병을 옮긴다는 사실이었다. 쥐가 옮기는 전염병으로는 발진열(쥐벼룩이 옮김, 치사율 1%), 흑사병, 살모증, 선모충병 등이 있었다. 그래서 1950~1970년대에는 정부 주관으로 쥐잡기운동이 벌어졌다. 보건위생 분야의 새마을운동이라고나 할까. 정부는 1년에 몇 번 쥐 잡는 날을 정해서 집집마다 쥐약을 나눠주었다. 학교에서는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집에 가서 부모님께 반드시 쥐약을 놓으라고 전할 것을 강조하였다. 한날한시에 집집마다 일제히 쥐약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정해진 시간에 사이렌까지 울렸다. 순진한 아이들은 그때 쥐약을 놓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줄 알았다. 학교에서는 쥐가 몇 마리 죽었는지 알아오라는 숙제를 내고는 일일이 숫자를 확인하였다. 아이들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집안을 돌며 쥐의 사체를 확인하였고, 겁이 많은 아이들은 엄마나 형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사망한 쥐가 한 마리도 없을 때에는 학교에 가서 숫자를 속이는 경우도 있었다. 중고등학교에서는 쥐의 꼬리를 잘라 가져오라는 숙제를 내주기도 했다.

1960년대 쥐잡기운동의 실례를 살펴보자. 서울시에서는 1962년 12월 15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 범시민운동으로 쥐잡기운동을 실시하였다. 중간점검 결과 1월 말 현재 46,221마리의 쥐를 잡았다. 1966년에는 보건사회부에서 쥐 한 마리를 잡는 데 5원의 보상금을 걸고 전국에서 쥐잡기운동을 벌였다. 모두 3천만 마리를 잡는 것이 목표였고, 1억 5천만 원의 보상금을 추경예산에 반영키로 했다. 잡은 쥐의 몸뚱이는 땅에 묻고 꼬리만을 가까운 보건소에 가져가면 누구든 보상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림. 9.

쥐잡기운동 홍보 포스터(1975년)

그림. 10.

쥐잡기 추진대회(1975년)

결핵, 기생충병, 연탄가스 중독사고는 1950~197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국민병이었다. 달리 말하면 이 시대는 ‘후진국형 질병’의 전성시대였다. 정부가 방역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쥐잡기운동을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진 것도 후진국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한국인의 역량이 집중적으로 발휘되어 경제성장에 성공한 결과 한국인의 질병 양상은 놀랍도록 달라졌다. 1980년 8월 경제기획원 통계국이 조사 발표한 ‘사망원인에 따른 한국인의 사망률’에 따르면 뇌혈관질환(14.8%), 순환기계 질환(11.5%), 고혈압(8.6%)이 1~3위를 차지하였다. 감염성 및 기생충성 질환과 연탄가스 중독사고가 퇴조하고 심혈관질환과 암 등 만성 퇴행성 질환의 전성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현대 한국의 발전상은 경제성장과 민주화에서뿐만 아니라 이와 같은 보건의료계의 변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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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결핵예방강조기간 선전탑(1958년)

그림. 2.

결핵예방강조주간 포스터(1960년대)

그림. 3.

제1회 전국결핵실태조사 (대한결핵협회, 1965년)

그림. 4.

대한결핵협회 이동 검진차(1960년대)

그림. 5.

기생충예방 계몽 포스터(1960년대)

그림. 6.

기생충예방강조주간 기념식(1970년대)

그림. 7.

보건소 직원들의 기생충 상담(1970년)

그림. 8.

고압산소장치(1970년대)

그림. 9.

쥐잡기운동 홍보 포스터(1975년)

그림. 10.

쥐잡기 추진대회(197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