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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Health Aff > Volume 2(1); 2018 > Article
‘격리’라는 장치
소록도 머문 지 어언 10년이다. 소록도 백년의 10분의 1, 공직생활 길어야 2,30년이니 꽤 많은 세월을 보냈음이 틀림없다. 일생에서 3분의 1이 수면이라는데 그 만큼 병원에서 생활했다. 퇴근 후에도 병원을 벗어나기 쉽지 않으니 절반의 고립(?)을 경험한다. 연륙된 지금은 섬 밖 통행이 자유롭지만 7년 전 다리가 없던 시절 유일한 방법이 선박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먼 1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일제강점기 시작이 주는 엄청난 굴욕에 이어 ‘외딴 섬 소록도 강제격리’는 한센인에게 시쳇말로 엄청난 트라우마였음이 분명하다.
한센병(나병)은 오래 전 불치의 전염병이라고 생각했었다. 이후 의학의 발달로 치료가 가능해졌고, 오늘날 불치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20세기 이후 의학기술의 진보로 중병(重病)이 아닌 이환후유증이 많이 남는 치료 가능한 질병이 되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정상인’과 뚜렷이 구분되는 이환후의 신체특징들은 전통적인 편견과 함께 작용하여 그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 배제해 왔다. 푸코(Foucault)의 설명에 따르면 이들은 사회로부터 추방된 존재로서 가혹한 공간분리, 거리 두기, ‘정상인’과의 비접촉의 규칙 등을 포함하는 권력의 타자로 존재해왔다. 이 질병은 중병(重病)으로 여겨져 왔으며, 환자는 사회에 위험한 존재로 여겨져 배제되어왔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략 13세기의 역사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이 질병과 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전통 관념도 ‘격리와 배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서양의 관념과 본질은 동일하였다.

성경과 영화 Ben-Hur속으로

구약시대에는 한센병1)을 죄가 형상화된 것이나 사탄이 들린 것으로 인식했다. 공동체에서 한센병환자가 발생하면 일단 사제가 규범에 따라 한센병인가 아닌가를 확인했다. 만약 한센병이면 그를 '부정(不淨)한 자'라고 선언했다. '부정한 자'로 선고받은 사람은 진영(陣營)이나 촌락에서 내쫓겨 그 외곽에서 살아야 했다. 그 의미는 유대인 사회에서 모든 것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에게 한센병은 전염성이 크고 유전 가능성이 큰 병으로 간주됐다. 이처럼 한센병에 걸린 환자들은 다른 곳에 격리돼 살았고, 인적이 있는 곳에는 절대 올 수 없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명령하여, 악성 피부병 환자와 고름을 흘리는 사람과 주검에 닿아 부정하게 된 사람을 모두 진영 밖으로 내보내게 하여라. 너희는 남자 여자 가릴 것 없이 내보내야 한다.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 머무르는 진영을 그들이 부정하게 만들지 않도록 해야 한다"(민수기5:2-3).
고대 이스라엘을 배경으로 한센병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영화가 벤허2)2)이다.
Scene I)
Man....
I’m searching for two women, a mother and daughter.
There.... There are many women.
Of the family of Hur.
We have no names here.
......
not to look them
지하 감옥에 갇힌 어머니와 여동생은 나병에 걸려 있었고 전염이 두려워 도시 밖으로 추방한다. ...벤허가 돌아 왔음에도 죽었다고 말한 뒤 환자 계곡으로 간다. 죽음의 계곡에 찾아간 유다는 엄마와 동생을 찾지만 만나지 못하게 한다. 바위 뒤에 숨어서 지켜볼 뿐....
힌센병에 관한 영화 벤허의 모습이다. 소위 환자 계곡에 스스로 유폐되는 환자의 이름은 無名氏이다. 거리에 나타나자 거지도 멀리한다. 성서시대부터 있었다는 한센병은 경멸적인 용어인 ‘leper’로 불린다. 사전에서는 ① 문둥이, ② 나병환자, ③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불린다. 1880년에 쓰여진 소설 벤허;그리스도의 이야기에서 적어도 강제격리는 아니더라도 환자들은 동굴 속에서 비참하게 사는 모습을 볼 때 단순히 작가의 상상력에 국한되지 않아 보인다. 성서시대부터 이러한 차별이 있었는지는 좀 더 문헌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분명한 사실은 하늘이 내린 중병(重病)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의 대접이 매우 박했다는 것은 분명하고 여기에 19세기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졌음이 확실하다.
일본 한센병 격리정책은 환자를 공간적으로 분리할 뿐 아니라 시간을 단절시켰다. 이것을 상징하는 것이 이른바 「원명(園名)」이다. 요양소에 입소격리 된 사람들은 그때까지 사용하던 본명을 버리고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다. 환자 스스로도 본인이 병듦으로 인해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걱정하여 원명을 사용하고 싶어 했다. 본명을 버린다는 것, 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인생을 버린다는 것, 버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입소자 스스로 요양소이외에서의 존재는 거부되어진 존재라는 자기인식을 강요받았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여기선 우리는 이름 따위 없어요’. 소록도에서도 비슷한 예가 있었다. 가족, 친지들과 이별 후 소록도에서는 뭍의 가족들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 성명을 버렸다. 후에 호적 취적 당시 원장의 성을 빌려 올리는 경우도 있었다.
다시 동생을 찾아 안고 마을로 간다. 도시는 황량하고 거지만 적선(積善)을 외친다.
Scene II)
Alms for the blind.
Help for the blind.
Look! Lepers!
Look! Lepers!
Go away!
Stay away!
결국은 적선 그릇에서 받은 동전을 버린다. 유다가 나병에 걸린 동생을 안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 한 푼이 아쉬운 거지도 나병이라는 말을 듣고 적선을 버리는 그런 존재로 그려진다.
소록도에서는 섬 내에서만 유통되는 화폐가 있었다. 고향에서 가족들이 송금해오거나 본인 소유의 돈을 소록도 화폐로 환전하여 사용케 했다. 이것은 ‘소록도 통용 화폐’3)만을 사용하게 하여 외부도주를 차단하고 소록도라는 격리공간에서의 경제행위만을 강요하여 신체적 뿐 아니라 생활 전반적으로 격리를 인식시키는 장치였다고 본다.
격리문제의 근원인 수용제도는 유럽에서 생겼다. 중세 십자군 전쟁후 나병이 창궐하자 유럽 전역에 수용소가 대거 세워졌다. 전염병을 옮긴다는 이유로 환자는 수용소에 격리됐다. 그러나 15세기를 지나면서 나병이 거의 소멸되자, 1656년, 루이 14세는 구빈원 설치에 관한 칙령을 반포했다. 그 후 파리를 기점으로 유럽 전역에 구빈원 형태의 수용시설이 운영됐고 나환자가 사라진 자리에는 극빈자로 분류된 사람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일본 문명국 지위와 격리라는 장치

조선시대 귀양은 형벌이었다. 죄인을 고향이 아닌 먼 시골이나 섬으로 보내어 일정한 기간 동안 제한 된 곳에서만 살게 함으로써 징벌했다. 소록도 한센인들의 입원기간은 보통 십 수 년에서 수십 년에 이른다. 젊은 시절 부지불식간에 소환되어 소록도에 발을 디디고 정착하여 살아온 시절. 강제격리는 질병을 이유로 가는 귀양에 비유될 수 있다. 긍정적인 의미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치유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일 수 있지만 부정 의미가 매우 강했다. 식민조선에서 일본의 한센병 인식은 전염병, 불치의 질병, 질병과 사람을 동일시하는 비문명국을 말한다.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따라 설립한 「소록도 자혜의원」은 기독교 나시설에 대한 식민지 조선에 있어 나정책 주도권과 일본 황실의 이미지 선전의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강하다. 일제에 의한 소록도는 절대격리를 위한 공간으로 질병의 박멸이 아닌 질병에 걸린 사람들의 박멸을 위한 공간으로 차별과 편견의 재생산 장소였다.
특히 일제 때 격리는 환자 측면보다는 건강자 보호 측면, 사회 치안 측면이 훨씬 강했다. 1934년 당시 일간지에 실렸던 기사에 의하면 ‘간호수는 지도원 역할을 맡았다. 전직경찰이나 헌병경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소록도자혜의원의 환자 수용규모가 커지면서 의료서비스가 제공되는 병원으로서 기능보다는 격리 수용된 환자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이 강화된다’4)
1931년 일본에서는 세계적인 동향과 달리 강제격리정책을 시작하였다. 이것은 감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하여 모든 환자를 요양소에 강제적으로 입소시킬 뿐 아니라 환자의 전염력이 없어진 이후에도 퇴원시키지 않는 정책이었다. 격리 과정의 강제성과 격리이후 퇴원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종생’ 격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소록도자혜의원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경쾌퇴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1920년대 후반 이후로는 그 수가 줄어들었고, 특히 소록도갱생원으로 전환된 1934년 이후에는 경쾌퇴원자가 거의 사라져 강제종생격리가 도입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5)
1920년대 말기 이후 세계적으로 한센병 전염성이 매우 낮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한센병 경증 환자에 대해서 사회로 복귀시키는 정책이 주류가 되었다. 그런데 일본은 과연 몰랐을까? 마쓰다 도시히코(松田利彦,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의 「시가 기요시(志賀潔)와 식민지 조선」를 보면 세계조류에 일탈한 일본의 속내를 알 수 있다.6)
일본에서는 1907년 나예방법에 의해서 한센병 환자의 요양소 격리가 규정되었고 식민지 조선에서도 1913년에 ‘나환자 단속에 관한 건’으로 격리방침이 정해졌다. 1916년 전라남도 소록도에 격리시설로 자혜의원을 설립하였다. 그런데 한센병의 원인이 밝혀짐에 따라 1920년대 말기 이후 전염성이 낮다는 사실이 세계적으로 한센병 경증환자에 대해서는 사회로 복귀시키는 정책이 주류가 되었다. 다만, 일본은 강제 격리방침을 유지하여 전후에도 오래도록 이러한 잘못된 방침을 고집하였다. 사실 시가는 이러한 한센병 환자의 강제격리방침이 잘못되었음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격리는 격리시설을 낳고 시설 내에서는 우생학이라는 이름하에 단종에 까지 이르게 된다. 일본의 근대 내셔널리즘은 학교ㆍ군대ㆍ병원ㆍ요양소 등의 공간을 통해 근대적 신체를 격리함으로써 배제하고자 했다. 근대국가라는 체재 내에서 격리 관리하고자 했던 것이다. 공간의 격리는 동시에 관리의 대상이자 통제이다. 공간의 분할을 위해서는 마땅한 논리가 요구되었다. 근대 국가주의의 자장 속에서 그 핵심논리의 하나로 작동했던 것이 바로 우생학이었다.
한국은 일본의 격리정책을 주로 받아들였는데 제국주의 일본의 정책은 한센의 조국 노르웨이와는 판이하게 달랐다.
1897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1차 국제나회의에서는 한센병은 전염병임이 공인됐으며, 또한 노르웨이의 한센병 극복 사례가 발표되었고, 격리정책이 각국에 권고되었다. 노르웨이에서는 처음으로 한센병환자에 대한 강제격리법이 입법되었고, 한센병 병원들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의 강제격리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상당히 달랐다. 환자들은 자신의 집에 격리되거나, 그럴 수 없는 환경에 있는 환자들만 병원에 격리되었으나 출입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병원도 오지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도시나 마을에 위치했다.
그러나 노르웨이에서의 강제격리정책과 달리 제국주의 국가들이 운영하는 한센병 시설에서의 강제격리정책은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이에 1923년의 3차 국제나회의에서는 격리는 인도주의적이어야 하며, 환자는 가족 근처에 있어야 하고, 환자가 집에 있을 환경이 아닐 경우에만 병원에 격리시켜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경우 이러한 권고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심지어 30년대 중반에 이르면 절대격리 정책으로 변화했다. 한편 1940년대 중반에 개발된 효과적인 한센병 치료제인 디디에스제의 개발로 인하여 한센병 정책의 일대 변화가 일어났다. 국제나회의와 1차 WHO 나전문회의에서는 강제격리의 폐지가 권고되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격리를 두려워하는 많은 환자들이 오히려 숨기 때문에 한센병 통제가 더욱 어려워진다. 둘째, 이들을 찾고 격리하는 데에는 높은 비용이 필요하며, 이 비용으로 더욱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의 개발할 수 있다. 셋째, 환자의 가족에 대한 스티그마화는 이들의 사회복귀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넷째, 환자에 대한 부당하고 비인도적인 차별은 이들의 사회복귀를 어렵게 한다. 다섯째, 강제격리의 지속은 대중적인 편견을 영속화한다.7)
입증된 치료약 부재로 한센병 전파를 억제하는 격리정책이 권고되었다 하더라도 노르웨이 등 유럽국가들은 기본적으로 환자의 집에서 고립시키거나, 부득이한 경우 국가시설에 고립시켰던 반면 일본은 물론 식민국가인 조선, 대만, 필리핀 등은 달랐다.
1958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WHO위원회는 “강제 격리를 만장일치로 거부한다. 나환자 수용소는 입원이 필요한 아주 전염성이 심하거나 회복기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으며, 또한 외과 수술환자의 회복이나 전문적인 재교육을 실시할 수 있는 기관으로 재편해야만 한다.” 고 결의했다. 이런 세계적 조류와 발맞추어 일제시대 이후 강력하게 실시되던 한센인 격리정책은 공식적으로는 폐지가 되고, 사회 속에서의 치료, 사회 복귀를 위해 정착사업 등 여러 장치가 시도되었다. 한센병 치료제인 Promin이 도입된 미군정이후에도 상당기간 격리가 지속되었다. 60년대 완치환자의 사회복귀를 돕고자 국가와 민간이 지원한 ‘정착촌 사업’은 절반의 고립, 격리라 할 수 있다. 한편 1963년에는 전염병 예방법에서 나병환자 격리 규정을 폐기하여, 법적인 격리가 공식 종결된다.
그러나 공식 격리 폐지 이후에도, ‘강송(强送)’ 제도가 존속되어 부랑한센인 등을 단속해 소록도로 강제송환을 했다. 이런 제도는 198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부랑인도 아니고, 양성환자가 아님에도 ‘강송’으로 소록도에 보내지기도 했다. 법 격리정책 폐지 이후에도 한센인에 대한 비공식 격리가 지속됨을 말한다.
1963년의 「전염병예방법」의 개정은 일본정부가 1996년에서야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격리의 근거가 되는 「나병예방법」을 폐지한 것과 대비하여 한국은 1963년에 벌써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를 폐지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음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된다. 그러나 이것은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 정책의 절반의 폐지라고 할 수 있었다. 제29조 2항에 의거하여 한센인들은 언제나 국가에 의해서 강제격리를 당할 수 있었으며, 특히 부랑환자선도사업에 의하여 엄청난 수의 부랑환자들이 국립 및 사립 나병원이나 정착촌 등지에서 강제격리 당했다. 1962년부터 1968년 사이에 4,462명의 나병환자들이 적발되어 나병 양성자들은 국립나병원으로 나병 음성자들은 귀성 또는 정착촌으로 강제송환(강송) 당했다. 한편 1977년 제정, 시행된 「전염병예방법시행규칙」에 ‘(전염병예방)법 제29조제2항의 규정에 의하여 제3종 전염병환자 중 격리수용 되어 치료를 받아야 한 자의 범위’를 ‘자가 치료를 함으로써 타인에게 전염시킬 우려가 있다고’ 인정된 자와, ‘부랑·걸식 등으로 타인에게 전염시킬 우려가’ 있는 자로 규정하여, ‘부랑 나병환자’의 강제격리에 대한 법적 근거를 더욱 명확히 했다.8)
소록도 내에서 몇 개의 내부격리가 이루어졌다. 크게는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엄격히 구분되었다. 전자는 치료와 통제에 종사하는 직원들이 거주하는 공간이었고 후자는 환자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철조망으로 된 경계선이 양지역간 이동을 철저히 통제하였다. 직원 거주공간은 무독지대, 환자거주공간은 유독지대로 불렸다.
한편 육지에서 공식 재판을 거친 한센인 수형자를 수용한 순천교도소 소록도지소는 1998년까지 존속되었다. 일반 수형자와 따로 분리시킨 것은 한센병을 무서운 감염병으로 잘못 인식했음의 반증이다. 또 다른 격리의 예는 1970년대 설립된 결핵치료병사이다. 외국 후원으로 설립된 이 병사는 입원자 중 결핵 발병자를 일반 병사에서 섬내 지리적으로 상당히 떨어진 깊숙한 곳에 따로 분리시켜 치료했다.
격리는 감염병 관리에서 시대를 초월해서 사용하는 중요 전략의 하나이다. 특히 접촉감염이나 호흡기 감염병은 그렇다. MERS 때는 지역사회에서 감염병 전파예방 즉 다수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격리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무시했던 결정이 반드시 옳았을까. 격리 자체가 주는 상처는 때론 인간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불가피하거나 충분히 설명되어 지고 공감의 격리는 좀 낫다 할 수 있다. 감염병으로 공중보건위기 상황이더라도 말이다.
한센병은 매우 전염력이 높고 신체파괴 질환이라는 오래전의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났다. 낮은 전파력에 쉽게 치료 가능한 질환이다. 그럼에도 한센병에 대한 마음의 격리는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에 짙은 상처로 남아 있음도 사실이다. 법에서 강제격리 조항은 1960년대 초 이미 사라졌다. 그러나 한센병은 말라리아, 결핵 등 19종과 함께 '제3군 감염병'으로 분류된다. '간헐적 유행 가능성으로 지속적 감시 및 방역대책이 필요한' 감염병으로 발생시 '지체 없이 신고' 대상이다. 일반인이나 전문가에게 한센병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법 근거다. 법정 감염병은 시민들에게 무시무시한 두려움을 안긴다. 얼마나 무서운 질환이면 국가가 관리할까. 한편으론 과연 한센병이 법정 감염병의 한켠을 차지할 자격이 있을까 고민하게 한다. 의학자 입장에서 우리나라에서 한센병이 법정 감염병 목록에서 사라진다면 편견 해소에 많은 도움을 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Notes

1) 성경 레위기13~14장은 사람들, 의복, 집에 생긴 “심한 피부병”을 다룬다. 헬라어 번역(레프라)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영어성경들의 번역은 ‘짜라아트’를 한센병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한센병이라는 번역은 분명히 옷과 집에 생긴 곰팡이의 경우에는 부적절하다. 이 히브리어 용어에 담겨 있는 다양한 피부 질환 증상으로 볼 때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로 한센병의 증상과 일치되는지 의아하다. 현대 의학의 입장은 한센병이 레위기에서 묘사하는 질병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는 데 일치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집트에서 나온 고고학적 증거는 주후 5세기 이전에는 한센병으로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를 보여 주지 않는다. 그 이전에도 한센병으로 간주된 병을 앓은 사람들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지만 기독교 이전 시대에 팔레스타인에서는 그런 사람이 확실히 드물었다. 둘째, 한센병의 증상은 레위기에 묘사된 병들의 묘사와 일치하지 않는다. 브라운에 따르면 ‘짜라아트’에 대한 성경의 언급 어디서도 “한센병의 명백한 징후와 증상을 담고 있지 않고,언급된 내용은 한센병이 아닌 다른 어떤 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아가 한센병의 전형적인 특성은 하나도 암시되어 있지 않다. 셋째, 헬라어 ‘레프라’는 실제 한센병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실제 한센병을 가리키는 데는 ‘엘레판티아시스’라는 다른 말이 사용되었다. 그렇다면 ‘짜라아트’가 한센병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면 어떤 특정 병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을까? 여러본문에서 ‘짜라아트’는 눈(雪)으로 비유된다. 영어번역들은 이 말을 “한센병에 걸려 눈과 같이 흰”이라는 어구로 번역함으로써 더 엄밀하게 비교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비교의 요점은 눈의 색깔이 아니라 흩날리기 쉬운 특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짜라아트’는 비늘처럼 벗겨지는 모종의 피부병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고든웬함, 『레위기』, 부흥과 개혁사 2017. p216,219,220

2) (Ben-Hur,1959: A tale of the Christ(1880). 작가는 Lew Wallace로 남북 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이자 작가.

3) 일제하 사용되었고 현존하지 않는다.

4) 국립소록도병원, 『국립소록도병원 100년사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의료편 p45-46, 2018.

5) 국립소록도병원, 『국립소록도병원 100년사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의료편 p46, 2018.

6) 마쓰다 도시히코, 『시가 기요시와 식민지 조선』,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제16회 전무가 초청간담회,2014.

7) 국립소록도병원, 『국립소록도병원 100년사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의료편 p26-28, 2018.

8) 국립소록도병원, 『국립소록도병원 100년사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의료편 p80, 2018.

참고문헌

1. 심 전황. 소록도 반세기. 전남일보 출판국, 1979.

2. 심 전황. 아으 70년-찬란한 슬픔의 소록도. 도서출판 동방, 1993.

3. 소록도 80년사: 1916-1996. 국립소록도병원, 1996.

4. 한국나병사. 대한나관리협회, 1988.

5. 다키오 에이지(瀧尾英二). 조선한센병사, 2001.

6. 정 근식, 채 규태, 박 영립, 장 완익, 최 원규, 윤 찬영. 한센인 인권 실태조사: 2005년도 인권상 황실태조사 연구용역보고서. 국가인권위원회, 2005.

7. 한센병-고통의 기억과 질병정책. 국사편찬위원회, 2005.

8. 박 선주, 이 덕경, et al. 또 하나의 고향, 우리들의 풍경. 국립소록도병원, 2011.

9. 김 프란체스코등, 최 태순, et al. 자유를 향한 여정, 세상을 내딛는 발걸음. 국립소록도병원, 2012.

10. 소록도 100년의 기억 : 국립소록도병원 100년 역사자료집소록도. 국립소록도병원, 2014.

11.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 국립소록도병원, 2017.

12. 일본 마이너리티문학 연구의 현재와 과제 - 내셔널리즘, 우생사상 그리고 궁극의 문학. 일본학보 제100집. 2014.

13.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나남, 2016.

14. 고든 웬함. 레위기. 부흥과 개혁사, 2017.

15. 마쓰다 도시히코(松田利彦,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시가 기요시(志賀潔)와 식민지 조선. 한림대 일본학연구소, <제국일본의 문화권력> 제16회 전문가 초청간담회. 2014-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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